📌 선 넘기
선을 그으며 사는 일은 익숙하고 편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선을 넘어야만 그 선 뒤로 열리는 관계도 있다.
-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은 뜬금없이 선을 넘어본 날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때는 10월 초, 더위가 꺾여버린 어느 날이었죠.
저녁을 먹고 뭘 할지 생각하는데 그날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하고 따분한 날이었어요.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선을 넘어보기로.
배드민턴 세트를 들고 나갔어요.
집 앞에 종합운동장에는 배드민턴 코트가 있었고, 그 무렵 날씨는 배드민턴을 치기에 너무나도 좋은 날씨였죠.
저는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덤덤했지만, 운동장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설렘 반, 걱정 반?
저에게 이런 도전은 처음이었고 한편으로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질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무언가 저를 압박해 온다는 생각이 들 때, 그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 앞에서 직면할 때가 있어요.
그때도 그랬었죠. 그래서 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뇌를 비우고 눈에 들어온 사람에게 바로 말을 걸었어요.
그때 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턱걸이를 하고 계셨던 30대 남자분이셨어요.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배드민턴 치실래요?”
라고 말했던 것 같지만, 상당히 떨면서 말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처음에는 사이비를 보듯이 보셨던 것 같아요.
이내 상황을 파악하시고는 웃으시면서 저의 선 넘기를 수락하셨죠.
배드민턴 코트에 자리가 없어서 적당히 배드민턴을 칠만한 장소에서 같이 배드민턴을 쳤어요.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그분도 저와 같은 개발자였죠.
그분은 개발 팀장급의 연차였고 저는 사원급의 연차였어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그쪽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갔어요.
저는 1~2년차 개발자의 입장에 대해, 그분은 팀장급 개발자의 입장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서로의 상황에 공감도 하고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각자의 문제를 봐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어요.
제가 어색하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할 때 그분이 제안하셨어요.
따로 연락처 공유는 하지 말고 다음에 여기서 또 만나자고.
본인은 9시에서 10시 사이에 오는 경우가 많으니 아마 볼 수 있을 거라고.
다시 만나면 우리 통성명하자고.
그렇게 낭만 넘치는 두 남자의 만남은 막을 내렸어요.
맞아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처음 1주일은 제가 사실 조금 낯간지러워서 피했어요..
그분은 저를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저를 피하기 위해 그 날 이후 운동장에 안 오셨을까요..?
제가 그분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운동장에 갔을 때는 한 번도 볼 수 없었어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죠?
사실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운동장을 나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