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소나
분명 다르다.
나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가면을 쓰지 않은 나’와 사회적 약속을 지키기 위한, 나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가면을 쓴 나’는 확실히 다르다.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부족사회가 시작되면서 부족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의 DNA에는 명확히 세겨져왔었기에..
그래서 인간이 페르소나를 가지고 타인을 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지 않은 한 가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게 알게 될수록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냥 종교처럼 믿으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깊게 안다는 것은 페르소나 너머,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본 모습에는 그 사람의 취약한 모습마저 있다.
과연 나의 취약한 모습을 알게 되더라도 사람들이 날 좋아해 줄까?
우리가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우리의 취약한 모습을 가리기 위하여 그런 것일 수 있다.
가면이 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함을 가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가면을 써야 할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린 모두 안다. 우리는 취약하고, 취약함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취약함을 드러내도 되는 존재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취약한 데가 있다.
-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김소민
친애하는 섭씨의 블로그에서 본 글귀이다.
죽을 때까지 가면을 써야 할지에 대한 답으로 제격이다.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면이 벗겨지는 때가 있다.
또는, 가면을 벗어야할 순간도 온다.
즉, 죽을 때까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마음을 먹어도 나의 취약함을 100%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취약함이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좌절? 관계의 포기?
나는 취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가까워 지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인간관계에서 가까워 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과정이다.
그래서 굳이 어떤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취약점조차 나의 일부니까,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이니까.
가면이 녹아 없어진 벌거숭이의 나를 나의 일부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두고 나를 외면하는 사람에 미련을 갖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